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7월 위기 (문단 편집) === 7월 25일 === 그런데 통첩시한을 몇 시간 남기고, 러시아 주재 세르비아 공사로부터 '''"러시아가 우릴 지원한다!"'''는 희소식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낭보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사실 오스트리아가 조금만 더 빨리 행동했어도 러시아가 이런 신속한 결단을 내리긴 어려웠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사라예보 사건 이후 약 1달여를 허비하는 동안 [[니콜라이 2세]]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중관료들은 독일의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이참에 오스트리아를 조지자는 식으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영국은 군주제 국가였고 프랑스도 군주제가 폐지되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검은 손을 지원하는 세르비아를 비판했고 공화국 입장에서도 한 나라의 차기 수장을 대놓고 암살한 단체를 지원하는 세르비아 왕실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러일전쟁]] 때처럼 적들을 과소평가하고 러시아 제국 내부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르비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급기야는 전쟁에 참가하여 세르비아를 도왔지만 1차 세계대전 참전은 러시아 제국을 망쳤다는 그 [[그리고리 라스푸틴|라스푸틴]]도 반대할 정도로 최악의 실책이었고 니콜라이 2세는 왕정과 제국을 파멸시키고 자신과 가족들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라스푸틴도 반대하는 것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만큼 니콜라이 2세가 당시 유럽 분위기는 물론 전쟁에서 중요한 명분 자체에 매우 무관심했다는 증거다.] 이에 세르비아 내각은 일제히 궐기하여 대 오스트리아 강경론으로 전환했으나, 러시아가 지원한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라는 제국을 상대로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최후통첩 중 오스트리아 관리의 자국 영토 진입을 거부하고 나머지를 수용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오스트리아에 통보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정부가 모호한 말돌리기로 답변을 회피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요구한, 공교육의 문제나 세르비아 고위직들의 공개적인 모욕행위, 그 외 자국 내에서 있었던 일을 일절 인정하지 않고 세르비아 정부가 사건에 가담한 증거를 내놓으라는 답변서를 보내놓고는 자기들이 국제법에 따라 오헝 제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고 호소했다는 주장도 있다. 세르비아의 외교술로 오헝 제국을 "저들은 우리가 요구사항을 다 들어줬는데도 침략했다." 며 비난할 명분을 마련했다는 것.[[https://www.cfr.org/blog/twe-remembers-serbia-responds-austrias-ultimatum|관련 글]]] 하지만 백지수표를 내준 독일[* 이것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을 피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을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제안을 무시하고 세르비아의 외교공문 접수를 거부하는 동시에 국교를 단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